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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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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준은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만석꾼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교육 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 지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경성방직 및 동아일보 참여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해방 후에는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구)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현 영남이공대학교)을 설립했다. 1964년에는 이병철에게 대학 운영권을 넘겼으나,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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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1884년)
기본 정보
한글 이름최준
한자 이름崔浚
로마자 표기Choe Jun
출생1884년
사망1970년
직업기업인
가족 관계
자녀최현배

2. 생애

경주 지방의 300년 만석꾼 최현식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준은 10대 시절부터 최부잣집을 방문한 최익현, 신돌석, 최시형, 손병희 등 구한말의 주요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항일 독립 정신을 키웠다. 그는 경주 지방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며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과는 사촌 처남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아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준은 개인 담보로 운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거액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가 파산할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 1918년 봄에는 김성수의 권유를 받아들여 1919년 10월 설립된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고, 동아일보의 창립 주주로도 참여했다.[2] 또한 1921년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 경주 대표로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에 꾸준히 참여했다.

해방 후, 최준은 일제 강점기 신탁 관리 하에 있던 재산의 3분의 1을 되찾아 이를 모두 교육 사업에 환원했다. 1947년에는 영남 지역 주요 가문들과 함께 훗날 영남대학교가 되는 (구)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대표 설립자가 되었고, 6.25 전쟁 중에는 피난 온 교수와 학생들을 위해 초급대학인 계림학숙(현 영남이공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남은 모든 재산과 집, 선산, 심지어 친척들의 집까지 사회에 환원했으며,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온 집안의 희귀 장서 약 9,000권도 전부 학교 재단에 기부했다.

최준은 대학을 모범적으로 운영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의 대학정비령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64년 삼성이병철 회장이 대학 인수 의사를 밝히자, 최준은 더 나은 대학 발전을 기대하며 대가 없이 운영권을 넘겼다. 그러나 1966년 삼성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위기에 처하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의 압력으로 (구) 대구대학청구대학과 함께 박정희 정부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어 현재의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이는 최준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귀결된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300년간 빈민 구휼에 힘썼던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부자로서, 최준은 나라를 빼앗기자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바치며 만석꾼 부자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의 삶은 부의 사회 환원이라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2. 1. 독립운동

경주 지방의 300년 만석꾼 최현식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준은 10대 시절부터 최부잣집을 방문한 최익현, 신돌석, 최시형, 손병희 등의 영향을 받아 항일 독립 정신을 키웠다. 그는 경주 지방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며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대한광복회 활동에 깊이 관여했는데, 1915년 12월 24일 경주 광명리에서 일어난 세금우편마차 습격 사건 당시 정보 제공과 탈취 자금 보관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과는 사촌 처남 관계였으며,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준은 거액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가 운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이 회사가 130만의 부채를 지고 파산할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

1918년 봄, 김성수가 경주의 최준을 찾아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창립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2] 최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19년 10월 설립된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고, 동아일보의 창립 주주로도 참여했다.[2] 한편, 손병희는 3.1 운동을 앞두고 최준에게 보성학원 인수를 제안했으나, 당시 최준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안정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에 집중하고 있어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김성수를 소개했다고 한다.

최준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11년 경주에 여성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사립 월성여학교(현 경주 월성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백산무역주식회사가 파산한 1927년에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최준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의 장인 김정섭과 그 동생들(김이섭, 김응섭), 사촌 자형인 박상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백산무역을 함께 운영한 안희제,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한 강우규 의사, 일본 황궁 앞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김지섭, 저항시인 이육사, 다물단을 조직한 임시정부 법무차장 남형우, 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 등이 그와 관계를 맺었다. 특히 이육사에게 큰 영향을 준 외삼촌이자 독립운동가인 허규와는 해방 후 대구에서 아양음사를 만들어 함께 활동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독립운동가 박상희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박상희의 딸이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인 박영옥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저녁 '부자들이 독립자금을 달라고 하면 3분의 1도 주지 않는데, 경주 최부자는 달라는 액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주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1921년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 경주 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후기 300년간 빈민 구휼에 힘썼던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부자로서, 나라를 빼앗기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전 재산을 독립운동 지원에 바치며 만석꾼 부자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2. 2. 교육 사업

최준은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인 경주 최부잣집은 수백 년간 지역의 향교와 서원들의 후원자였으며, 집안에서 여러 서당을 운영하기도 했다.[2] 그는 1911년 초등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사립 월성여학교(현 월성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이 학교는 그가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가 파산한 1927년에 공립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3·1 운동을 앞두고 손병희는 최준에게 보성학원 인수를 제안했으나, 당시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김성수를 소개했다.[2] 비록 직접 인수는 못했지만,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해방 후, 최준은 일제 강점기 신탁 관리 하에 있던 재산의 3분의 1을 되찾아 이를 모두 교육 사업에 환원했다. 그가 설립하거나 설립에 기여한 주요 교육 기관은 다음과 같다.

설립 연도기관명비고 (현 기관명)
1911년사립 월성여학교여성 초등교육 기관 (현 월성초등학교)
1947년(구) 대구대학민립 대학, 대표 설립자 (현 영남대학교의 전신)
6.25 전쟁계림학숙초급대학 (현 영남이공대학교의 전신)



이 과정에서 그는 남은 재산뿐만 아니라 집, 선산, 심지어 경주 교동 친척들의 집까지 모두 사회에 환원했으며,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온 집안의 희귀 장서 약 9,000권도 전부 학교 재단에 기부했다. 당시 많은 사립대학들이 부정입학 등 문제를 겪었지만, 최준은 부정을 배격하며 모범적으로 대학을 운영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의 대학정비령으로 사립대학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준은 (구) 대구대학을 더 발전시킬 여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던 중, 삼성신현확을 통해 이병철 회장의 인수 제안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이병철 회장은 "한강 이남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최준은 이 약속을 믿고 아무 대가 없이 대학 운영권을 넘겼다.

하지만 1966년 삼성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위기에 처하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이병철에게 성균관대학교 운영권을 주는 대신 (구) 대구대학을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병철은 최준과 상의 없이 이에 동의했고, (구) 대구대학청구대학과 함께 박정희 정부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어 현재의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이는 최준의 순수한 교육 사업 의지와는 다른 결과를 낳게 된 과정이었다.

3. 재산 환원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에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으며, 특히 사촌 처남인 박상진이 총사령관으로 있던 대한광복회에서는 재무를 담당하며 재정 지원에 힘썼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거액의 자금을 전달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주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최준은 사실상 전 재산을 투입했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130만의 부채를 안고 파산할 정도의 막대한 규모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독립운동가 박상희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바 있다. 박상희의 딸 박영옥 여사는 훗날 "다른 부자들은 독립자금을 요청하면 3분의 1도 주지 않는데, 경주 최부자는 요청한 액수보다 훨씬 많이 주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1911년에는 사립 월성여학교(현 경주 월성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기여했다.

광복 후, 일제의 신탁관리 하에 있던 재산의 3분의 1 가량을 되찾았으나, 이 역시 교육 사업을 통해 사회에 모두 환원했다. 첫 번째로, 1947년 영남 지역 주요 가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민립 (구)대구대학교 (훗날 영남대학교의 모체 중 하나)를 설립하고 대표 설립자가 되었다. 두 번째로, 6.25 전쟁 중에는 경주로 피난 온 교수와 학생들을 위해 초급대학인 계림학숙(현 영남이공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최준은 남은 재산뿐만 아니라 과 선산, 그리고 그의 뜻에 동참한 경주 교동 친척 일가의 집까지 모두 기부했다. 또한 수백 년간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급 희귀 장서 약 9,000여 권도 새로 설립된 학교 재단에 전부 기증했다. 수백 년간 부를 이어온 만석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 자신과 친척들의 재산까지 모두 사회에 환원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사례로 평가받는다.

4.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5. 가족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최부자댁 종손은 최염으로, 현재 서울에 살고 있다.[3] 그는 성균관 고문을 맡고 있으며, 영남대학교 재경동창회장으로서 영남학술진흥재단을 출범시켜 4000억 이상의 자금을 영남대학교에 지원되도록 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300 Years of Wealth Shared by the Choe Clan of Gyeongju https://www.kocis.go[...] 2019-01
[2] 서적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황금가지 2007
[3] 뉴스 '경주 최부잣집' 종손 최염씨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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